1974 | 100만 톤 출하 1억불 수출, 100만 톤 출하 기념(1974.12.31) 1972년 중후판을 국내시장에 출하한 지 3개월 만에 미국과 타이완에 수출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에는 탄탄한 원가경쟁력을 기반으로 해외시장을 21개국으로 확대했다, 이를 바탕으로 포스코는 3년 만에 1억 달러 수출과 100만 톤 출하는 달성했다.

1979 | 포항 4기 건설 포항 4기 설비 종합착공식 장면(1979.2.1) 1981년 2월 18일, 포항 4고로가 준공되면서 포항종합제철은 조강 연산 850만 톤 규모의 세계적인 철강사가 되었다. 설비 착공 이래 11년 동안 4단계에 걸친 확장공사를 통해, 세계 11위의 대단위 일관제철소를 완성한 것이다.

1968 | 초기 건설요원들의 애환이 담긴 ‘롬멜하우스’ 해송을 배경으로 롬멜하우스(초기건설본부) 앞에 선 건설요원들(1968) 모래바람 속에서 건설을 진두지휘하던 건설사무소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막의 영웅이었던 롬멜 장군의 야전사령부처럼 보인다하여 ‘롬멜하우스’라고 불렸고, 모래바람과 뜨거운 볕, 모기와 쏟아지는 잠. 이 모든 것을 상대로 하는 싸움이 밤낮없이 이어졌다.

1969 | 먼저 인재를 키워라 제철연수원 현판식(1969.1.15) 힘겨운 건설과정 속에서도 먼 앞날을 준비했다.인재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육훈련 전담조직을 갖춰 철강 기술인력을 자체 양성할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다. 1968년 4월 1일 ‘직원들의 지식과 기술을 세계적 수준에 도달시킨다’는 방침 아래 ‘생산훈련부’를 설치했으며, 1969년 2월 1일에는 ‘제철연수원’과 ‘교육과’를 신설했다.

1970 | 종이마패 설비구매재량권 (1970) 제철소 건설이 윤곽을 잡아갈 즈음, 설비구매와 관련해 각종 외압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박태준 사장은 설비구매는 포항종합제철의 재량에 따라 처리한다는 요지의 문서를 준비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하였고, 대통령은 친필로 사인하여 이를 허락한다. 이후 회사는 설비구매에 있어서 모든 외압을 거절하고 공정하고 효율적인 계약을 진행할 수 있다.

1970 | 대역사의 막이 오르다. 포항 1기 종합착공식 전경(1970.4.1) 1970년 4월 1일 오후 3시, 영일만 가득 힘찬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 박태준 사장이 착공 버튼을 누르는 순간, 한민족 역사에 큰획이 그어졌다. 철강재 자급 촉진, 국제수지 개선 및 고용 증대, 자주국방 능력 강화 등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1973 | 땀, 쇳물되어 흐르다 마침내 쇳물을 쏟아내는 포항 1고로(1973.6.9)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마침내 출선구가 ‘펑’하고 뚫리며 황금빛 쇳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내는 온통 만세소리로 뒤덮였으며, 건설요원들의 볼에는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들이 포항 벌판에 뿌린 땀방울이 모여 쇳물로 승화한 그 순간 우리 민족의 새로운 획이 그어졌다.

1973 | 철강 한국의 시작을 알리다. 포항1기 종합준공식(1973.7.3) 1973년 6월, 제철 일관공정에 필요한 22개 공장과 설비 건설이 모두 완료됐다. 39개월 동안 총 1,204억원의 비용을 들여 조강 연산 103만 톤 체제를 갖춘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기록이었다.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의 문턱을 넘어 더 깊은 곳에 도달하는 계기를 맞게 됐다.

1973 | 다시,건설이다. 포항 2기설비 종합착공식 (1973.12.1) 첫 출선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 포스코인들은 당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내 철강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포항 2기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조업을 하고, 한쪽에서는 건설을 진행하면서 마침내 1976년 포항 2기 설비 준공과 함께 포스코의 생산능력은 260만 톤으로 늘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