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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93] 배정운 S&M미디어 회장, 포스코냉연 경쟁력의 토대 연합철강에서 놓았다
카테고리
포스코 기획
날짜
2018-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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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년 들어 한보그룹의 부도로 공중에 떠버린 당진제철소의 실수요자 문제를 두고 포스코와 현대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자못 뜨거웠다. 철강금속신문(당시 한국철강신문, 철강신문)은 이 문제에 대해 포스코에 비중을 두고는 있었지만, 업계를 대변하는 전문지로서 눈에 띄게 어느 한쪽을 거들고 나설 수는 없는 입장이어서 중립적인 논조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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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연합철강, 국제상사서 수출업무 맡으며 포스코와 40년 인연
    - 신일철이 일본의 철강신문 기사 활용하는 것 보고 철강신문 창간

    - 25년간 독립성 유지하며 철강업계 대변지로서의 사명 견지

     

     

    1997년 들어 한보그룹의 부도로 공중에 떠버린 당진제철소의 실수요자 문제를 두고 포스코와 현대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자못 뜨거웠다. 철강금속신문(당시 한국철강신문, 철강신문)은 이 문제에 대해 포스코에 비중을 두고는 있었지만, 업계를 대변하는 전문지로서 눈에 띄게 어느 한쪽을 거들고 나설 수는 없는 입장이어서 중립적인 논조를 지키고 있었다. 이에 대해 포스코는 뭔가 마뜩지 않은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현대는 현대자동차의 노관호 부사장을 현대제철(당시 인천제철) 사장으로 포진시켰다. 철강을 잘 몰랐던 노 사장은 이런저런 자료를 살피다가 한국철강신문을 즐겨 보게 되었고, 철강을 공부하는 텍스트로 삼을 정도로 가까이 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철강신문에 현대의 광고가 몇 번 실렸다.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철강금속신문 배정운 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일이란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바라보면 이상하게 보이는 겁니다. 당시 포항제철에서는 철강신문이 자신들을 적극 지원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 싶으니 좀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런 중에 현대의 광고가 몇 번 실리니까, 바로 전화를 해온 것이었어요. 포철의 S전무가 우리 신문의 김성덕 전무에게 약간의 항의성 전화를 했는데, 두 사람은 서울고등학교 동기동창이었어요."

     

    서로 흉허물 없는 사이이기에 말도 스스럼없이 오갔다. S전무가 '철강신문이 현대를 지원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러느냐'고 물었고, 김성덕 전무가 '신문사 입장도 있는 것 아니냐'고 답한 것까지는 통상적인 대화의 범위였다. 하지만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약간 듣기 거북한 말이 오갔다.

     

    "우리가 포철 시키는 대로 해야 하나? 우린 포철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김성덕 전무의 말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그대로 포철 최고경영층에까지 보고되었다. 김만제 회장은 불쾌한 표정으로 오늘부터 철강신문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지시했다. 이후 포철의 지원은 완전히 끊겼다. 경제적인 문제를 넘어서서, 명색이 철강신문이 국내 철강업계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포철과 갈등 관계에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부자연스런 일이었다.

     

    "당시 포철 홍보 라인과도 그렇게 우호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보니 답답했습니다. 신문사 내부적으로는 우리 나름의 조치를 취하자는 등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나는 시간이 해결할 문제이니 기다리자면서 말렸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동원할 만한 학연이나 지연이 더러 있었지만, 그런 데는 일절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11개월이 지나 포철 김종진 사장이 보자고 해서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문제가 해결되었어요."

     

    ▶ 1994년 12월 1일 서울 중구 남산 힐튼호텔에서 열린 포스코개발(현 포스코건설) 창립 기념 리셉션에서 이운형 세아제강 회장, 김만제 회장, 김진주 부사장, 배정운 철강신문 회장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그는 1963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ROTC 1기로 입대해, 통역장교로 복무하다 1965년3월 전역했다. 집에서는 상대 출신이니 은행 취직을 권했다. 은행 시험이 9월에 있었으므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에, 천양산업 신입사원 모집 광고가 눈에 띄었다. 천양산업에 재직하고 있는 고등학교, 대학 선배에게 의견을 구했더니 괜찮은 회사니 오라고 했다. 은행으로 들어가기까지의 시간이라도 때워보자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천양산업은 1965년 당시 수출 실적 2위를 기록하고 있는 무역회사였어요. 인삼 등을 수출하는 농산물과, 오징어 등을 수출하는 수산물과, 흑연·중석·철광석 등을 수출하는 광산물과가 있었습니다. 광산물과로 배치되어 양양철산에서 나오는 철광석을 일본 야하타제철소에 수출하는 업무를 맡았어요. 내가 왜 이 이야기를 다소 장황하게 하느냐 하면 이때 나와 철강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1967년에는 준공을 목전에 둔 연합철강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해 역시 수출업무를 맡음으로써 철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이듬해에는 6개월 동안 도쿄지사에 근무했고, 1970년에는 국제 입찰을 통해 대만석유공사에 드럼 제작용 냉간압연제품 보디(body)를 수출하기도 했다. 당시 국내 산업에서 연합철강의 위상은 대단했다. 1972년 수출 1위 기업이 됐고, 포항제철소 1기 준공 이듬해인 1974년에는 1억불 수출탑을 받기도 했다.

     

    "1970년들어 중동 시장이 열렸는데, 정부에서는 지원을 해주면서 중동 진출을 적극적으로 권유했어요. 그때 마침 연합철강이 이란에 수출을 좀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란지사 한국 1호로 나갔습니다. 이후 1977년 뉴욕 주재 이사로 있을 때, 잘 알다시피 연합철강이 국제상사로 넘어가는 태풍이 불어닥친 거야. 남들이 20년 걸쳐 겪을 일을 나는 몇 년 사이에 다 겪었지. 그해에 포스코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으니 이해를 돕기 위해 그동안의 과정을 간단히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는 임원도 했으니 회사를 떠나려 했지만, 그의 학·경력을 살펴본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은 그를 상무로 진급시켜 수출, 원료, 자재 업무를 맡겼다. 그는 그때 포스코와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은 후 지금까지 무려 40년 세월 동안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셀러스 마켓에서 길러진 습관, 포스코 마케팅 능력 취약하게 만들어

    포스코의 탄탄한 상공정 덕에 하공정 경쟁력에 많은 도움 받아 

     

    "연합철강에서 가장 중요한 원재료는 당연히 핫코일이었습니다. 당시 연합철강뿐만 아니라 국내의 냉연업체나 강관업체에서는 핫코일을 일본의 신일철 등에서 수입해 쓰고 있었어요. 매분기 신일철과 연합철강 사이에 가격 협상이 타결되면 일신제강, 부산파이프, 한국강관에서도 그 가격을 적용받았습니다. 당시 일본에 철강신문이 몇 개 있었는데, 신일철에서는 상담 중에 신문을 곧잘 이용했어요, 일본 일간철강신문에 나온 철강재 가격 전망 등의 기사를 들이대는 거야. 당연히 일본에 유리하게 작성된 기사였지."

     

    그는 그때 막연하게나마 국내에도 저런 신문이 있으면 참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생각은 후에 그가 한국철강신문을 창간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런 중에 1977년 들어 포스코의 핫코일 일부가 국내 시장에 나왔다. 전량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다가 일부라도 국내 조달이 이루어지니 수요업체에는 큰 힘이 되었다.

     

    "핫코일 수요가 연합철강이 가장 많았습니다. 국내 수요와 포스코의 국내 공급량을 비교하면 공급이 절대 부족했어요. 일본산과는 상당한 가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수요업체에서는 매분기 포스코에 많은 물량을 신청했지만, 포스코는 신청한 대로 주지 않는 거야. 포스코도 달라는 대로 다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겠지만, 그러한 절대적인 셀러스 마켓(Seller's Market)에서 길러진 습관이 결국 포스코의 마케팅 능력을 취약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당시 국내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포스코의 마케팅은 '상담이 전혀 없는 할당'이었다고 했다. 수요업체별로 물량을 할당해 놓고 나서 가격은 일방적으로 '얼마'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는 것이다. '할당'이라는 말이 성에 차지 않는지, 아예 '배급'이었다면서 당시를 떠올렸다. 물론 포스코 내부적으로 국내외 시장 수급,원가 등을 충분히 검토한 후 결정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때 내가 포스코에 출입했습니다. 안병화 판매 담당 상무에, 오종환 판매관리부장이었지요. 그 외에도 오일용, 손근석, 전순효, 박문수, 이런 분들과 얼굴을 맞대고 지냈습니다. 싸우기도 하고 사정도 하면서 아무튼 잘 거쳐 왔지. 과거의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초기에는 연합철강 현장에서 포스코가 공급하는 핫코일에 거부감을 보였다. 엔지니어들은 속성적으로 원재료의 교체를 싫어하지만, 일본산에 비해 품질이 한참 떨어지는 포스코의 제품은 그들에게 그 이상의 거부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는 전량 포스코 제품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현장의 저항을 다독였다. 이후 포스코 제품은 매우 빠른 속도로 품질이 안정되어 갔다.

     

    "가격이 일정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달랐습니다. 연합은 수출을 많이 하는데, 핫코일이 비싸면 해외 시장에서 경쟁할 수가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더니, 포스코에서 로컬가(local價)라는 제도를 만들어 수요업체를 지원해 주었어요. 수출용 원자재에 적용하는 가격이었지. 연합에서는 냉연제품을 두고 포스코와 경쟁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표면처리 쪽으로 방향을 틀기도 했습니다. 컬러강판, 전기아연도금강판 등이 그래서 개발된 것이었어요. 당시 수요업체에서 볼멘소리로 포스코를 '갑 중의 갑'이라고들 했고, 그런 지적에 일리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업스트림(상공정)에서 탄탄한 경쟁력을 갖춘 포스코가 있었기 때문에 다운스트림(하공정)인 전문 냉연업체,강관업체 등에서 많은 혜택을 본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1985년 연합철강 공중 분해··· 포스코 출신으로 경영정상화팀 꾸려

    16개 철강사, 2개법인 각 1구좌, 개인출자로 철강신문 자본금 마련 

     

    1980년에는 연합철강을 떠나 그룹 내의 국제상사 철강사업본부장으로 갔다. 제조업에서 유통업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철강은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국제상사는 수출 실적 4위를 기록하고 있었지만, 철강사업부에서는 연합철강의 물량만을 취급하고 있었으므로, 포스코의 물량은 삼성, 대우, 쌍용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동안 포스코와 거래하면서 친분을 쌓아온 그에게 포스코 물량 확보라는 미션을 맡긴 것이었다.

     

    "같은 포스코지만 내수판매와 수출이 부 단위로 나누어져 있었으므로, 내가 거래하던 판매부와는 다른 수출부를 새로이 뚫어야 했어요. 그때 포스코 수출부에는 이선구 부장, 이구택 차장이 있었는데, 인간적으로는 따뜻하게 대해 주었지만, 특별히 국제상사를 봐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기존의 상사들이 너무나 막강하게 포지셔닝되어 있었기 때문이지. 포스코의 배려로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물량을 늘려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국제그룹이 그만 공중분해되고 만 거야. 1985년 2월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지. 국제그룹 회장이 폭설로 인해 청와대 모임에 늦게 간 것 등이 문제가 되어 정치적인 파산 선고를 당했지. 정말 웃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공중분해 당시 그는 국제상사의 영업 총괄 부사장이었다. 이제 직장생활은 끝이다 했는데, 연합철강을 인수한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이 그에게 연합철강의 수출 인력을 확보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연합철강의 수출 조직망은 상당히 막강한 인력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인선 작업을 마치고 나니 장 회장은 '졸병만 보내고 대장이 안 오면 어떡하느냐'며 그에게 연합철강 부사장을 강권했다.

     

    "1986년 3월 24시간 철야로 개최된 첫 주주총회에서부터 대주주 간에 감정이 격화되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회사가 동국, 반동국(反東國)으로 나뉘어 상호 반목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어요. 보다 못한 정부에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1986년 8월 포스코 인맥으로 구성된 경영정상화팀을 꾸려 보냈습니다. 그때 고준식 사장을 비롯해서 박종태, 신창식, 김진주 이런분들이 오셨어요. 나는 그때 골치가 아파서 회사를 그만두는 것을 전제로 뉴욕에 가 있었습니다."

     

    사태가 진정된 뒤 돌아와 한동안 철강 제조업체(두양금속,영흥철강)를 거쳐 철강 무역 등의 일을 하다가 문득 연합철강 재직 시 신일본제철과 핫코일 가격 협상을 할 때 그들이 곧잘 활용하던 '일간철강신문'이 떠올랐다. 돈은 없지만 인적 네트워크는 살아있으니, 추진해볼 만한 일로 생각되었다. 문제는 상업적 가능성이었다. 아무리 유용한 일이라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몇 군데 알아보니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당신 같은 경력의 소유자는 백전백패'라는 진단이었다. 그런 일은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해본 사람이 발행인이 되어 직접 발로 뛰면서 취재도 하고 기사도 쓰는 식으로 꾸려가야지, 경영 마인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당시 전문신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장애물이었다.

     

    "최청림이라는 친구에게 의견을 구했더니 절대 하지 말라는 거였어요.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으로 나와는 막역한 사이였는데,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까지 다 팔아먹을 생각이면 하라는 거야. 그런데 한국일보 경제부장을 거쳐 사장까지 지낸 박병윤이라는 친구는 조금 달랐습니다. 일본에서는 전문신문이 상당히 잘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잘만 하면 될 수 있을 거라면서 한번 해보라고 했습니다. 조언을 들은 참에 연합철강 기획실에 사업계획서 작성을 부탁해서 창간 작업에 나섰어요."

     

    머릿속이 상당히 복잡했다. 과거 박태준 한국철강협회장이 1년에 몇 억 원씩 주고 공업신문의 2개 지면을 사서 철강, 금속 전문 지면으로 활용해 봤지만, 겨우 2년 하다가 실패했던 사실도 떠올랐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단순한 신문이 아닌 업계의 대변지, 정보지, 교류의 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정 개인이 아닌 철강업계가 함께 나서서 일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업계 CEO를 두루 만나 사업 설명을 했습니다. 언론계와 산업계의 만남이 아니라 같은 철강업계 인사로서의 만남이었어요. 특히 업계 원로이신 포스코 황경노 회장과 전계묵 전 상공부 차관보의 격려 등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결국 16개 철강사에서 각 1구좌씩, 그 외 개인적인 친분으로 협조해준 2개 법인에서 각 1구좌씩, 총 18개 법인에서 3억 5000만 원, 나머지는 내가 출연해서 모두 7억 5000만 원의 자본금이 형성되었어요."

     

    그는 업계에 부담이 되는 기사는 싣지 않는다고 했다. 안병화 포스코동우회장은 만날 때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신문은 가끔 긁어야 해. 그러니 피 안 나올 정도로 긁어.'라고 했지만, 업계의 대변지로서의 사명을 여일하게 견지해 왔다. 이후 포스코를 비롯한 업계의 적당한 지원으로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고 20년 이상 끌어왔다.

     

    "포스코의 냉연 조업을 개척한 사람은 연합철강 출신이었습니다. 포스코의 초대 냉연부장 신계연씨가 당사자입니다. 포스코가 내년이면 창립 50주년이 되니 우리나라 철강업도 꽤 연륜이 쌓였어요. 포스코의 원로들을 만나보면 한보를 현대에서 가져간 것이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는 잘 된 일이라고 하더군요. 제철소의 원가경쟁력은 원천적으로 상당한 부분이 건설단가에서 나오는데, 포스코는 정부 지원에 힘입은 바 컸고, 현대 또한 아주 헐값에 인수했으니, 두 제철소가 국제경쟁력을 상당 기간 유지할 것으로 봅니다."

     

    현대와의 경쟁체제, 포스코 마케팅 경쟁력 향상에 좋은 영향 미쳐

    여러 번의 산업구조 재편 속 일본을 튼튼하게 받쳐준 힘 철강업에

    후배들에게 감사, 無욕심, 건강관리, 인간관계의 중요성 당부

     

    그는 포스코가 근래에 와서 마케팅 등에서 많이 개선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현대와의 경쟁 체제가 가져다 준 효과일 것으로 진단했다. 현대의 마케팅은 그야말로 무섭다는 것이다. 포스코가 소극, 수동, 방어적이라면 현대는 적극, 능동, 공격적이라는 말에는 포스코에 대한 질책 같은 느낌이 전해졌다. 홍보, 기획, 재정 분야에서 외부 매체를 이용하는 현대의 능력은 자못 탁월하다는 것이다.

     

    "현대는 우리 철강금속신문뿐만 아니라, 일간지나 경제지는 물론 인터넷 신문까지도 용도에 맞게 잘 이용해요. 철근, 형강과 관련해 건축법을 개정해야겠다고 판단했을 때나,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도 매체를 곧잘 이용합니다. 물론 포스코가 현대와 똑같은 식으로 하지 않고 세계적인 위상을 굳힌 선발 업체로서 금도(襟度)를 지키는 부분이 있기는 할 것으로 봅니다."

     

    현재 한국은 인당 철강소비량이 1톤을 넘어섰지만, 세계 최대의 인구 대국인 중국과 인도의 소비량은 매우 보잘것없으므로 철강업의 성장 여력은 크다고 진단했다. 1974년 7억 톤이었던 전 세계 조강 생산량이 현재 16억 톤으로 늘어났으니, 앞으로 중국이나 인도의 인당 소비량이 1톤에 다다르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철강업의 사양산업 논쟁은 그 나라의 정치, 사회, 노동, 환경 등의 구조적인 여건과 관련된 문제이지 철강업 자체의 경제성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만약 한국의 철강업이 경쟁력을 잃으면 한국의 산업 전반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산업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건설, 조선, 기계, 자동차, 가전 등이 모두 철강다소비산업인데, 그런 분야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동안 산업구조의 재편을 여러 번 겪어온 일본을 튼튼하게 받쳐준 힘은 철강업에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서울상대 금속과를 나왔다는 농담을 듣는 그는 우연한 기회에 철강업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지만, 현재 세계 최고의 지위를 점하고 있는 한국 철강업과 함께 지내온 삶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 말에는 삶에 대한 자긍심이 묻어났다.

     

    "직원들에게 가끔 몇 가지 당부를 합니다. 감사하게 생각하라. 욕심 부리지 마라. 건강 잘 챙겨라.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라. 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이건 먼저 세상을 살아온 선배의 지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은 선배들의 지혜보다는 청장년층의 꿈과 야망에서 나옵니다. 장로층(長老層)에서 나보다 젊은이가 더 낫다는 생각을 가지면 세대차도 넉넉히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 철강업계 인사들과 한자리에 선 배정운 철강신문 회장. 왼쪽부터 고 이운형 세아제강 회장, 홍영철 고려제강 회장, 배정운 회장,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박건치 철강협회 부회장, 이구택 포스코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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